[편집자주: ‘복지인물iN’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지에 감사하며 복지와 관련된 인물의 업적, 비하인드 등을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새롭고 흥미로운 소식으로 매주 찾아오겠습니다. 복지의 여정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사설 요양원 백양원 설립자 백남포(왼쪽 맨 위) 선생.
사설 요양원 백양원 설립자 백남포(왼쪽 맨 위) 선생.

1900년대 결핵은 변변한 치료 약이 없어, 맑은 공기를 마시고 ‘요양’하는 일이 최고로 꼽혔다. 공기 좋기로 유명했던 마산은 결핵환자들을 위한 요양원 설립 부지로 각광받았다. 결핵 치료의 한 축을 담당했던 국립마산요양원도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이후 요양원 신설은 순탄치 않았다. 대한결핵협회 백남포 선생(1921~1980)도 당시 인근에 ‘백양원’이라는 요양원을 설립해, 많은 환자를 구호하겠다고 했지만 끝내 해내지 못했다.

그는 1950년대 우리나라 결핵 문제의 핵심이 ‘병상의 부족’임을 먼저 짚었던 인물이다. 결핵은 한 번 걸리면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인식돼, 지역 주민들의 요양원 설립 반대가 극심했다. 결핵 예산을 늘려달라 나라에 호소하던 백 선생도 결핵 요양원 포기각서를 쓸 정도였다.

 

결핵 투병으로 요양원 관심 갖게 돼

우리나라 결핵 사망률은 한때 71.3%, 환자 수는 한 해에만 1만 명이 넘어설 만큼 심각했다. 전염병의 유행에 백남포 선생도 22살의 나이에 결핵이 발병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전시 총동원령이 내려지고, 모두가 궁핍해서 사실상 결핵은 불치병에 가까웠다. 그 역시도 민간요법, 한약 등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6년 동안 병세는 호전될 기미가 없었다.

결핵치료기관인 국립마산요양원에서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받은 그의 폐는 이미 망가져 되돌리기에 어려웠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괴롭게 한 결핵으로 아내와 동생을 떠나보냈다. “죽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그는 발병 10년 만에 결핵 특효약을 구해 완치될 수 있었다. 그때 이 약은 전쟁으로 먹고 살 것도 없던 시절 소 열 마리 값이었다.

동아일보에 보도된 백남포 선생의 투병 극복기. [사진=국사편찬위원회]
동아일보에 보도된 백남포 선생의 투병 극복기.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완치 후 사업에 성공해 부를 축적한 백 선생은 재산을 전부 결핵환자들을 위해 쓰기로 했다. 질병의 고통을 절감했던 그이기에 내릴 수 있었던 선택이었다. 백 선생은 37세가 되던 해, 국내 최초의 사설 결핵 요양원을 짓고자 결심했다. 그래서 1957년 10월 경남 구포읍(부산시 동래군 군포읍 만덕리)에 야산 1만 7천 평을 매입했다. 그 위에 올라갈 병동 건물은 117평에 달했다.

정부와 결핵협회, 언론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국립마산요양원은 늘 수백 명의 입원 대기 환자가 밀려, 결핵 병상수를 늘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정부는 외국 원조에 의존하던 국가적 상황에서 사비를 들여 환자를 치료하는 시설을 만들 형편이 되지 못했다. 아무도 나설 수 없었던 국가의 돌봄 문제를 개인이 해결하려는 그에게 다들 감동했다.

 

요양원 포기 각서 쓰고 백양원 처분

그런데 건립이 착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2월 한 주 동안 일곱 차례나 인근 주민들이 공사 현장에 몰려와 요양원 설립 저지에 나섰다. 이들은 열심히 파놓은 우물을 돌로 메꾸고, 담을 허물고, 공사 도구를 탈취하는 것은 물론 공사 중인 인부에게 주먹도 휘둘렀다. 백양원을 환영하는 정부의 반응을 보고 정부와 백 선생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을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특히 주민들은 백양원이 마을의 위쪽에 자리 잡으면서, 결핵 환자들이 사용하는 물 등의 결핵 전파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민감했다. 사실 보건사회부 장관과 군수, 경찰 등은 공기 전염 우려가 없을 만큼 요양소와 주민 간의 생활반경이 거리가 먼 것을 확인하고, 사용수 처리 방안에 대한 확답까지 듣고서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고 추진했던 일이었다.

백남포 선생은 보건 세계보건세계 1958년 9월 호에 한 기고문을 통해 “요양원 반대 부락민들은 허무맹랑한 중상까지도 하고 있다. 더욱 서글픈 것은 사회의 저명한 일부 인사까지 결핵과 요양원에 대한 상식이 부족해 그들의 반대를 옳은 것으로 편들고 있다는 점이다. 과단성 있는 행정조치까지도 망설이는 우리의 비건설적인 관료주의를 슬퍼지지 않을 수 없다”라고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

결국 계속되는 주민들의 반발로 1959년 4월 결국 그는 요양원 포기각서를 썼다. 현 부지의 건축지는 다른 사업으로 전환되고, 정부의 인가와 관계없이 결핵환자를 수용했을 때 주민들이 건물을 파괴해도 좋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결핵 완치환자의 채용도 금지하는 등 백 선생에게 불공정한 합의안이었다.

이 각서를 쓰고 나서야, 나머지 공사는 방해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이곳은 당초 요양원에서 결핵 완치 환자의 사회복귀 시설로 변경됐다. 사회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훗날 주민들은 사회복귀 시설도 “요양원과 같다”는 이유로 건물을 완전히 파괴했다. 이 폭력으로 환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그의 결핵 요양원 설립기는 끝내 좌절됐다.

 

백남포 선생은 결핵 투병기를 담은 책 “봄은 다시 온다”를 발간하면서, 국가 결핵 대책에 대해 보건교육의 획기적 실시, 결핵 예방접종의 의무화, 결핵 병상 확충 등 결핵 퇴치 방안을 제시했다. 또한 이 책으로 수많은 결핵환자에게 완치의 희망을 선물했다. 아쉽게도 백양원 건립은 ‘님비현상’으로 끝내 실패로 돌아갔지만, 현재 질병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면서 결핵을 향한 시선은 개선됐다.

한편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는 세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최근 서울시가 장기요양기관이 부족한 지역에 요양시설을 늘리기 위해 일정 요건 이상 재개발 시 요양시설 설립을 의무화는 방침을 추진 중이나,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시설 설립이 백지화되는 분위기다. 이 같은 모습은 약자의 편에 서서 복지를 주도했던 그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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