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복지인물iN’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지에 감사하며 복지와 관련된 인물의 업적, 비하인드 등을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새롭고 흥미로운 소식으로 매주 찾아오겠습니다. 복지의 여정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故 김석산 회장 [사진=초록우산 어린이재단]
故 김석산 회장 [사진=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우리나라 아동복지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부모를 잃은 아동을 집단으로 수용하며 발전했다. 이 영향으로 아동복지사업의 틀은 ‘시설보호’로 자리 잡았다. ‘초록우산’으로 잘 알려진 어린이재단 김석산 회장(1941~2010)은 시설보호로 편중된 아동복지 서비스에 문제를 제기했다. 어린이의 성장발달의 핵심은 어머니와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인관계라는 점에서, 김 회장은 “집단보호는 최후적 방편으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졸업논문에서도 “이 사회는 가정을 잃은 아동에게 새로운 가정이나 가정과 유사한 성장환경을 보장해 줄 의무가 있다”고 강조한 바 있었다. 이러한 신념 아래 그가 운영했던 어린이재단은 치료보다 예방, 시설보호보다 가정과 유사한 환경, 선의에 기반한 민간적 접근보다 법률에 의한 제도적 접근으로 아동복지 서비스 발전에 앞장서 왔다.

 

아동복지사업의 지향점은 ‘탈시설화’에 기반한 복지사업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은 김 회장의 아동복지 정책에 대한 방향성과 동일하게 운영됐다. 평소 그는 시설아동들을 다시금 부모나 연고자의 품에 안길 수 있게 하기를 원했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제도적 배려와 민간기관의 아동복지 탈시설화 중요성 인지가 이뤄져야만 가능했다.

초록우산을 쓰고 웃고 있는 아동들. [사진=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초록우산을 쓰고 웃고 있는 아동들. [사진=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그에 따르면 아이들이 가정 복귀나 혹은 가정위탁 보호를 통해 아동복지시설을 떠나고, 시설은 행동 교정을 위한 전문 치료시설로 쓰이거나, 지역사회 아동 이용시설로 전환해야 한다는 게 아동복지 서비스의 지향점이다. 이런 철학을 반영한 어린이재단의 대표적인 사업이 ‘불우아동 개인 결연사업’과 ‘소년소녀가장 돕기’였다.

불우아동 결연사업은 예방적 사업으로서 아이들이 더 이상 시설로 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주목표였다.어린이재단은 사회복지관을 건립해, 사회복지사들이 최대한 많은 지역사회 아동을 챙기도록 했다. 그 일환으로 가정방문을 진행했는데, 이때 사회복지사 1명이 평균 110가정의 180명의 아동을 보살필 정도였다. 또한 본 재단의 어린이집 운영 및 지원도 아동의 시설 진입을 막기 위한 이유였다.

특히 어린이재단은 일정 기간 위탁가정에서 아동을 양육하는 가정위탁제도를 정부와 함께 운영하면서, 그가 원했던 가족 중심의 돌봄을 제도화했다. 김 회장은 가정위탁 보호 시범사업을 실시한 지 18년 만에 2003년 전국적으로 17개의 가정위탁지원센터를 개소했다. 아동복지법이 개정된 2005년부터는 가정위탁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면서 적극적으로 가정위탁 사업을 전개하게 됐다.

 

후원자 은혜에 보답하고자 복지의 길로

사실 김 회장은 대학 졸업 전인 1963년 당시 미국의 기독교아동복리회(CCF,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전신) 한국지부에 입사해 아동복지 일을 시작했다. 영문학을 전공한 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 길을 선택했던 것은 바로 자신이 자란 보육원 원장이자 양어머니인 유을희 여사 때문이다. 그는 CCF의 지원을 받는 대전 유성구의 ‘천양원’이란 아동시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지원받던 가정이 보내온 감사편지와 후원금. [사진=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지원받던 가정이 보내온 감사편지와 후원금. [사진=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당시 유을희 여사는 천양원 유지를 위해 CCF의 지원을 계속 받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는데,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김 회장은 이때부터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또한 지금까지 자신을 도와준 기독교아동복지회와 후원자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한 인터뷰에서 김 회장은 “저는 후원자들의 후원금으로 배움의 기회를 얻었고, 후원자들이 보내준 글에서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저에게는 낳아 주신 부모님도 계시지만, 저를 키워준 후원자님들 또한 저의 부모입니다. 제가 어린이재단의 회장으로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 평생 사회복지의 외길을 걷게 된 것은 바로 운명이 아닐까 싶습니다”고 했었다.

이후 그는 CCF의 번역사로 시작해, CCF 한국지부 군산분실장, 한국복지재단 사무총장, 부회장 등을 거쳐 1995년 7월 재단 회장으로 취임했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평직원에서 회장의 자리까지 오른 기념비적인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린이재단이 미국 기독교아동복리회(CCF)의 지원을 받는 외원기관에서 자력으로 국내 아동을 돕는 민간기관으로 자립을 주도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故 김석산 회장은 미아 찾아주기 운동, 아동학대예방사업, 각종 복지관 및 복지시설 운영 등 우리나라 사회복지역사의 획을 그은 굵직굵직한 사업을 많이 해왔다. 양어머니 지도 덕분에 자기 성장의 기회를 잡았던 그는 또 다른 아동을 위해 일했다. 단순한 보호가 아니라 가정 안에서 사랑과 관심을 받게 하자는 그의 아동복지 철학은 152만 명의 빈곤아동과 약 8천 명 미아들에게 가족을 찾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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