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복지인물iN’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지에 감사하며 복지와 관련된 인물의 업적, 비하인드 등을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새롭고 흥미로운 소식으로 매주 찾아오겠습니다. 복지의 여정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이영춘 [사진=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영춘 [사진=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일제강점기 시절 위생에 대한 개념이 바로 잡히지 않았기에, 사람과 동물 모두 질병에 노출된 채 살아갔다. 일본인 농장주인은 벼를 재배하는데 중요한 동물인 소를 위해 수의사를 채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농민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는 없었다. 당시 쌍천 이영춘(1903~1980) 선생은 농민을 진료했고, 더 나아가 전 농민의 보건교육에 힘썼다. 치료보다는 예방이 중요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의사로서 진료와 보건연구를 했으며, 지역사회 개발자이자 교육자였다. 특히 기득권과 안락을 버리고 어려운 지역에 아무도 관심 주지 않았던 ‘농촌 의료복지 제도’를 구축한 그의 업적은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된다. 

 

교원에서 구마모토 농장의 전속의로

이영춘 선생은 본래 사범대 출신 교사로 계속해서 학생을 가르칠 계획이었다. 급성늑막염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경험하기 전까진 그랬다. 자신의 건강도 챙기고 삶을 안정적으로 살고자 했던 그는 의사로 전직했다. 소박한 바람과 달리 그의 의사 생활은 환자를 진심으로 대하느라 평화롭지 못했다. 가난을 경험한 그는 열악한 농촌 농민의 삶을 외면할 수 없어, 평생을 공중보건에 집중했다.

처음 공중보건의 중요성을 인식한 계기는 1929년 세브란스 의전 졸업식에서 에비슨 교장의 말씀에서 비롯됐다. 에비슨 교장은 “여러분은 이제부터 고귀하고 유익한 직업을 맡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능력껏 병자를 치료해라. 그러나 치료보다는 예방이 중요하다. 공중보건은 교육과 계몽으로 촉진된다”고 말했다.

이영춘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 [사진=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영춘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 [사진=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또한 나라의 발령을 받아 개원의로서 활동한 곳이 의료비 부담 능력이 취약한 농촌이었던 것도 그가 공붕보건의 관심을 기울이는데 크게 작용했다. 그렇게 3년간 산간주민들이 정말 빈곤에 허덕이는 것을 경험한 그는 교수로서 승진을 포기하고, 은사의 농민 대상 무료진료사업 의사직 권유에 응했다. 의사직은 일본인 농장주가 농민들을 위해 낸 공고였는데, 개원자금을 마련하기까지 기한부로 있겠다는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거절할 정도로 꺼리는 자리였다.

구마모토 농장에 부임한 이영춘 의사는 본부 농장에 39평의 진료소를 신축해 진찰실, 수술실, 실험실 등을 갖췄다. 이곳은 무료진료로 운영돼 증상의 경중과 상관없이 많은 환자가 밤낮으로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뤘다. 실제로 그는 1935년 첫해에만 농민 7천 명, 이후 연마다 3만 명에 육박하는 농민을 진료했다.

 

무료진료사업에서 학교위생사업도... 공중보건 확대 총력

1938년 농장주의 배려로 이 선생은 해외에서 열린 동양농촌위생회의에 참가해, 각국의 현황을 직면하고 농촌보건의 중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귀국한 그는 자신이 보건교사로 봉직하던 개정공립심상소학교 ‘학교위생’에 먼저 관심을 가졌다. 전교생 중 체온 37.2를 넘는 아동이 1/3 이상이고, 이들의 결핵양성률이 24.7%에 이른다는 점을 알아낸 그는 농장주, 도지사,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위생실 건립과 양호교사 배치를 적극적으로 건의해, 학교 위생 안전망을 구축했다.

이러한 학교 위생 지도 요청은 점차 확대되어 ‘영양’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듬해 극심한 가뭄으로 학생 340여 명이 점심 도시락을 갖고 오지 못했다. 안타까운 모습을 목격한 이영춘 선생은 농장주에게 요청해, 부스러진 쌀알을 얻어왔다. 덕분에 아이들은 주먹밥 1개씩과 소금으로 굶주림을 피할 수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 학교급식의 효시다.

이 무료진료사업과 학교위생사업의 성과는 대단했다. 1942년 일본군의관들은 병력자원 확보 목적으로 17~19세에 달한 조선인 청년 신체검사를 실시했다. 보통 신체검사 합격자 비율은 지역별 40%에 불과한데, 그가 활동하던 옥구군 개정면만 평균의 2배로 80%였다. 더불어 그는 농촌과 농민의 건강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단순한 진료소를 넘어 연구소, 병원, 요양소가 합쳐진 종합의료원을 만들고 싶었다.

농촌 위생연구소의 후신인 개정 중앙 병원의 전경. [사진=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농촌 위생연구소의 후신인 개정 중앙 병원의 전경. [사진=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에 그는 질병의 치료가 아닌 예방에 초점을 두어 농민의 위생상황 조사와 연구, 예방의학의 실천 지도를 담당하는 농촌위생연구소를 1948년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농민들을 가장 괴롭히는 질환인 결핵, 기생충, 매독 예방에 최선을 다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구충제를 보급하고, 퇴비 개량으로 회충 감염을 대폭 개선하는 등의 활동을 지속해서 시행했다.

1970년대에 자영업자들끼리 모여 의료보험조합 붐이 일었다. 그런데 그가 위생교육을 주도한 지역인 옥구군(군산시)에서는 병의원이 직접 나섰고, 옥구청십자의료보험을 만든 해에 보건사회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 운영했다. 이 중심에는 그가 한때 운영했던 씨그레이브기념병원이 있었다. 40여 년 동안 이영춘 선생이 조성해 놓은 농촌위생 인프라는 의료보험 제도화에도 기여했다.

 

공중보건은 팬데믹 등 질병 예방에 중요한 요소다. 이를 일찍부터 눈치챈 이영춘 선생은 위생교육으로 농촌을 계몽했고, 그 공로로 대한민국 문화훈장·대한적십자사 봉사상을 받았다. 그는 일제 말기 호남지역의 가난한 농민과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가난을 구제한 한국의 슈바이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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