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복지인물iN’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지에 감사하며 복지와 관련된 인물의 업적, 비하인드 등을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새롭고 흥미로운 소식으로 매주 찾아오겠습니다. 복지의 여정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박순이 선생 [사진=충현원]
 박순이 선생 [사진=충현원]

고아원은 육아시설로서 보통 갓난이 때를 지나 들어온다. 그리고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이곳에서 생활한다. 반면 영아원인 충현원은 달랐다. 한국전쟁 전후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에 길거리로 버려진 신생아들이 입소했다. 아이들은 기관에서만 자라지 않고, 가정에서 자라도록 해외 입양도 보내졌다. 충현원 설립자 박순이(1921~1995) 선생이 ‘생명존중’ 기반의 ‘탈시설화’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그의 시설 운영은 사회문제 ‘치료’가 아닌, ‘예방’ 사업 중심이었다. 불가피한 전쟁고아는 고아원에서 돌봐야 하지만, 최종적으로 고아 발생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예방해야 한다는 게 박 선생의 입장이었다. 훗날 어린이집을 설립한 것도 친모가 태어난 아이를 직접 키워 고아 발생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다. 더 나아가 이미 남겨진 고아는 시설에서 키우기보다는 ‘가정위탁’이나 ‘입양’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기관 운영 방침은 그의 신념과 일맥상통한다.

 

어린 시절 ‘은혜’ 회상하며 고아에 헌신... 사재도 털어 건진 생명만 4700여 명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는 아이들은 돌보기가 수월하지만, 아직 걸음마도 못 뗀 신생아들은 한시라도 한눈을 팔 수 없을 만큼 손이 많이 간다. 그래서인지 당시 고아원은 있어도, 영아원은 없었다. 즉 영아를 키운다는 사람은 선뜻 나타나기 쉽지 않은 시대였다. 그러나 박순이 선생은 1942년 한국 최초의 영아 고아를 위한 시설인 충현원을 설립해, 소중한 생명을 돌보기로 결심했다.

누구나 다 어려웠던 일제강점기에 유년기를 보냈지만, 풍족하게 살았던 경험에서 그의 영아 사업은 시작됐다. 어린 시절 미국 선교사의 집에서 거주했던 박 선생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소위 부자들만 할 수 있는 피아노까지 배울 수 있었다. 배고픔을 모르고 살았던 감사함에 그는 죽어가는 ‘영아’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국가 보조금도 없이 운영해야 하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결단은 더 대단했다.

초창기 충현원에서 아이들 모습. [사진=충현원]
초창기 충현원에서 아이들 모습. [사진=충현원]

특히 박 선생은 고국으로 철수하던 미국 선교사들의 ‘이민제안’을 거절하고, 되려 그들이 떠날 ‘빈집’을 빌려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영아 사업을 진심으로 대하였다. 이렇게 한 선교사의 사택에 설립된 충현원은 아이들로 넘쳐났다. 그도 그럴 것이 입소한 갓난아기만 120여 명에 달했다. 전쟁으로 넘쳐나는 고아들에 수용인원의 한계를 느꼈던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사재를 털어 더 큰 부지로 시설을 옮기기도 했다. 충현원에서 생명을 건진 아이들의 수는 4700여 명이었다.

그의 헌신에 아이들도 그를 정말 엄마처럼 여기고 감동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일화로 실제로 다른 시설로 이전한 아이들이 식음을 전폐해 병원에 입원하거나, 현 시설에서 탈출해 충현원으로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관련 법에 따라 영아원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 고아원으로 이동해야 했다.

 

충현원을 설립하면서도 ‘탈시설화’ 행보 보여줘

이처럼 이별을 받아들이기에 어려웠던 아이들과 달리 박 선생은 ‘헤어짐’이 당연했다. 그는 영아원 설립 때부터 ‘탈시설론자’로서, 고아원이 아닌 이밖에 ‘다른 곳’으로 아이들을 보내는 게 그의 평생 숙제였다. 그는 “고아원을 세워서 고아를 돌보면 10억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고아들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서는 1억원이면 충분하다”며 “다함께 고통 분담을 나누어 가질 각오로 사회문제 예방의 복지사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충현 어린이집 기공식 현장. [사진=충현원]
충현 어린이집 기공식 현장. [사진=충현원]

박 선생은 고아를 사후적으로 돌보는 것보다,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이에 1970년대 들어 한화아동재단(NKCF)의 후원을 받아, 아동상담소, 어린이집, 어린이 놀이터 등을 개원해 미혼모와 영아를 돌보는 어린이 사업을 펼쳤다. 아동전문병원도 열어, 보육시설에 있는 모든 고아원 어린이가 무료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모친이 키울 수 없으면 ‘가정 위탁’을 보내, 아이들이 최대한 가정의 삶을 배우도록 노력했다. 그는 1975년부터 1995년까지 광주 순천에 사는 50명의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를 계기로 ‘가정 위탁 제도’는 현재까지 제도화되어 시행되고 있다.

또한 제도적으로 국내외 입양을 권장하면서 그는 충현원에서 1967년부터 1991년까지 해외 ‘입양’ 사업도 전개했다. 이어 해외입양 한인의 뿌리 찾기 운동 사업도 진행했다. 해외입양 한인들이 언젠가는 자신이 태어난 모국으로 돌아와, 부모님과 일가친척을 찾는 이들이 증가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실제로 충현원은 현재 20만 명이 넘는 해외입양 한인들의 고향과 고국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됐다.

 

돌봄 트렌드가 ‘치료’ 목적의 의료서비스에서 수요자 중심의 ‘예방’ 차원의 요양으로 대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에서야 ‘예방’에 관심을 갖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박 선생이 얼마나 일찍이 깨어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돌봄에 대한 그의 선각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국적으로 200여 개의 고아원이 남아있고, 약 2만 명의 ‘고아’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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