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복지인물iN’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지에 감사하며 복지와 관련된 인물의 업적, 비하인드 등을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새롭고 흥미로운 소식으로 매주 찾아오겠습니다. 복지의 여정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오방 최흥종(五放 崔興琮, 1880~1966). 최흥종의 호인 ‘오방’은 집안의 일, 사회적 체면, 경제적 이익, 정치적 활동, 종파적 활동과 같은 '다섯 가지를 놓아버린다'는 뜻이다. [사진=오방 최흥종 기념관]
오방 최흥종(五放 崔興琮, 1880~1966). 최흥종의 호인 ‘오방’은 집안의 일, 사회적 체면, 경제적 이익, 정치적 활동, 종파적 활동과 같은 '다섯 가지를 놓아버린다'는 뜻이다. [사진=오방 최흥종 기념관]

한센병(나병)은 세균 ‘나균’에 의해 발생한 만성 감염병으로, 일제강점기 때 한센병 환자는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에게 격리 대상이었다. 그러나 한 외국인 선교사는 아무렇지 않게 한센병 환자를 마주했다.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에서 의사의 조수로 일하던 ‘최흥종 선생’은 한센인에게 차별 없이 대하는 외국인을 목격하고, 같은 동포인 한센인 환자 치료에 최선을 다하게 됐다.

그는 갖은 인권침해로 고통받던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나병을 구제한다는 의미의 ‘구라행진’을 벌이기로 했다. 구라행진은 최흥종 선생에 의해 주도되고, 한센병 환자 500여 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건이다. 이들은 광주에서 장성-정읍-완주-익산-논산-대전-천안-평택-수원-남태령을 거쳐 서울로 11일간 이동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정문 앞에 앉아 강도 높은 시위를 진행했다. 이때부터 한센병 환자들의 대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왜 한센인들은 구라행진을 했을까?

한센인을 멸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개선하고자 했던 최흥종 선생의 ‘한센인 치료’ 소식은 대규모 환자 유입의 기폭제가 됐다. 밀려드는 환자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땅 1,000평을 기증해 1912년 '광주나병원'을 열었다. 이곳은 한센인 치료시설, 자립을 돕는 직업훈련원, 학교 등 복합적인 역할을 하며 또 다시 환자들이 불어났다.

그러나 ‘나병원 인근 채소밭에서 난 채소에 나균이 붙어있다’는 악성 루머가 퍼지게 되면서, 시민들의 항의로 환자 60여 명이 1926년 전남 여수시의 ‘애양원’으로 이주했다. 애양원은 그를 필두로, 제중원 원장 등과 유지들의 헌금을 모아 건설한 집단촌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센인 수에 비해 치료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일제는 ‘한센병 환자’를 신의 후손이 통치하는 나라라는 이미지에 흠결이 된다고 생각하고, ‘한센병 환자’를 사회에서 철저하게 배제했다. 조선총독부는 전라남도 고흥군의 작은 섬인 소록도의 원주민을 이주시키면서까지, 소록도 수용소에 한센인 환자들을 격리했다. 특히 한센병은 유전된다는 믿음 속에 일제는 단종(불임수술)과 낙태를 강제했다.

계속해서 악화하는 상황에 그는 나환자 근절을 위한 1928년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를 조직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어용단체인 ‘조선나예방협회’를 설립하고 민간인에 의한 한센병 치료 모금을 금지했다. 한센인의 기본적 인권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이 묘연해지자 결국 최흥종 선생은 1933년 무렵 한센인 환자들과 구라행진을 주도했다. 적절한 치료와 완치된 환자의 자립생활을 위해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게 그의 명백한 입장이었다.

 

어떤 성과와 파급효과를 낳았을까?

최흥종 선생을 비롯한 한센병 환자들은 구라행진하는 동안 노숙을 하거나 역 대합실에서 잠을 자고, 교회나 산에서 얻은 식량으로 끼니를 겨우 해결했다. 최소 5명 이상 사망했던 고행길에도 광주에서 출발할 때 150여 명이었던 한센인은 서울에 도착할 즈음에 5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다들 장장 7시간에 걸쳐 격렬히 농성했고, 그 또한 다른 선교사 등과 같이 총독을 면담하고 나환자 근절책으로 격리, 치료, 구제, 예방 4가지를 요구했다.

그 일환으로 최흥종 선생은 소규모로 운영되던 자혜의원 시설 확장을 제안했다. 한센병은 유전병이 아닌 감염병이므로, 선진국 사례에 따르면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격리 치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환자 수는 1만 6천 명에 이르지만, 치료시설의 수용 능력은 약 16%에 불과했다. 그의 제안은 치료시설을 늘려 격리 치료하고, 전염병의 예방도 도모하자’는 취지였다.

이를 받아들인 총독은 한센인들에게 자혜의원(소록도갱생원)의 확장과 단종의 폐지를 약속했다. 자혜의원의 수용인원이 1916년 100여 명이었지만, 해방 시기에 6,000여 명에 이르렀던 것은 역시 구라행진의 성과였다. 다만 안타깝게도 병의 증세만으로도 힘들어했던 한센병 환자들은 직접 요양소 확장 공사도 진행하고, 중일 전쟁에 사용할 군수 물자 생산과 같은 강제노역에도 동원돼 더욱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구라행진이 끝난 후 최흥종 선생은 주변에 자신의 사망 통지서를 돌렸다. 이 사망 통지서는 속세에서 떠나겠다는 그의 다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해방 이후 병들고,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쏟았다. 대표적인 예가 나주시에 완치한 한센인 자활촌 ‘호혜원’과 결핵 치료를 위한 움막 요양소 등이다.

현재 정부는 한센병 관리 사업으로 피부병 검진, 의료비 지원, 피해자 위로 및 생계비 지원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처음 한센인에 대한 소록도 격리 정책을 추진할 때만 해도 현 정부의 한센인 지원 정책 기조는 단순 ‘수용’이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정부가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책’을 추진하고 사람들의 병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거둬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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