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복지인물iN’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지에 감사하며 복지와 관련된 인물의 업적, 비하인드 등을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새롭고 흥미로운 소식으로 매주 찾아오겠습니다. 복지의 여정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청각장애아동의 교육권 보장에 힘쓴 성동원 정규순 원장 [사진=사회복지법인 성원]
청각장애아동의 교육권 보장에 힘쓴 성동원 정규순 원장 [사진=사회복지법인 성원]

청각장애 교육의 선각자였던 정규순(1919~2001) 선생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을 중시했다. 청각장애아동에게 최고의 복지는 일자리 제공인데, 이를 위해 수화와 기술을 반드시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념 아래, 그는 청각장애인의 교육과 거주라는 일련의 과정을 지원할 수 있는 복지체계를 만들었다. 교육기관으로는 인천맹농아학원(現 인천성동학교)을 설립했다. 이곳은 70년 가까이 지금 현재까지도 학생을 배출한다는 점에서 특수교육의 모범 사례로 불린다. 또 다른 시설은 이들을 위해 마련된 보금자리로 청각언어장애인 거주시설 ‘성동원’에서 장애 학생들은 어엿한 어른이 되어 후배 장애인을 위해 기술을 가르치고, 고민도 들어주며 지내기도 한다.

 

고아사업을 하면서 농아사업에 관심 두게 돼

북한에서 배로 건너오기 쉬운 인천은 6·25전쟁 무렵 피난민이 주로 거주했던 지역이다. 인천의 달동네인 만석동 괭이부리마을은 아이들도 판잣집에서 끼니 동냥을 해가며 겨우 살아갔다. 성공한 사업가였던 청년 정규순은 이곳으로 물건을 납품하러 갔다가, 어려운 아이들을 많이 목격했다. 그는 그 길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겠다”고 다짐하고, 1953년 고아시설 성동원(現 청각언어장애인 거주시설)을 설립해 운영했다.

이 성동원에는 청각장애를 가진 고아도 들어왔다. 그때 인천에는 청각교육을 받을 수 있는 특수학교가 없었다. 고아인데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아동을 안타깝게 생각한 성동원 정규순 원장은 서울 국립 농아학교에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전문가 선생님을 초빙했다. 청각장애인들에게도 교육을 통해 자립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그의 교육 철칙이었다.

인천맹농아학원(現 인천성동학교) [사진=사회복지법인 성원]
인천맹농아학원(現 인천성동학교) [사진=사회복지법인 성원]

그 후 성동원이 청각장애아동도 교육받는 고아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러 인근 고아원에서 청각장애인들이 그의 시설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가 특수교육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때다. 고아사업을 한지 2년 만에 그는 인천 내 다른 청각장애아동들의 교육을 위해 1956년 인천맹농아학원을 개교했다.

1962년 이전까지 교육부의 인가를 받은 특수학교는 인천맹농아학원을 포함해 전국에 모두 10개교에 불과했다. 비장애인도 힘들었던 시절이기에 1960년대 초 한국의 특수교육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면 그가 펼쳐 온 농아사업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성동학교부터 직업보도소까지... ‘독립’의 기반 배움터

인천맹농아학원이 학교로 정식 허가된 1961년부터 1984년까지, 정규순 선생은 23년간 초대 교장으로 봉직했다. 이 학원에서 교육자로 지내는 동안 그는 자립보호를 원칙으로 삼았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었던 셈이다. 교육 현장에서 최우선시되어야 할 일 역시 청각장애아동의 일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었다.

이에 그는 ‘수화’를 강조했다. 자립을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 능력’이라고 봤다. 정규순 선생은 청각장애인들도 수화를 활용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바랐다. 인천맹농아학원은 지금도 ‘전반적인 의사소통 능력 향상’을 목표로 말과 수화의 사용에 대해 적극 권장하는 학교생활을 유도하고 있다.

성동보호작업장 [사진=사회복지법인 성원]
성동보호작업장 [사진=사회복지법인 성원]

또한 기술로 사업을 번창시켜 부를 축적한 그는 언어활동뿐만 아니라 ‘기술’교육도 빼놓지 않았다. 초·중·고등부 아이들은 졸업 후 사회에서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직업교육을 받았다. 1970년대에 그는 성동원 부설 직업보도소를 설치해, 청각장애 아동들이 일을 배우고 돈도 벌 수 있도록 도와줬다.

당시 직업보도소는 일반 사기업과 업무제휴를 맺어 구두 제작 방법을 알려주고 일감을 주는 형식으로 운영됐다. 장애인 취업의 성공 사례로 뽑힐 정도로 엄청난 성과를 만들어 냈지만, 정부보조금을 받는 사회복지시설이 일반사업자와 연관해 직업을 주는 것은 정부 규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제화사업은 종료됐다. 그런데도 그는 손으로 글자를 찍는 인쇄사업을 통해, 어려운 이들에게 독립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 공로가 인정되어 정규순 선생은 정부로부터 1981년 대통령상과 1983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이렇듯 청각장애아동의 교육권 보장은 인천맹농아학원 설립자 정규순 원장이 늘 주장하고 행동하던 당연한 권리다. 1세대 청각장애 특수교육 대부의 일대기는 청각장애 학생들이 수어통역, 문자 등의 교육 편의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특수학교의 신설이 시급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최근 30년 동안 청각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가 10개 이상 줄어 전국 13교에 불과하다. 이중 절반이 넘는 학교가 수도권에 집중돼, 지방에 거주하는 청각장애 학생은 제대로 된 교육환경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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